NEON GENESIS EVANGELION
「Genesis Q (제 25 화 Part.F)」
「Genesis Q (제 25 화 Part.F)」
노엘의 수려한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것이 비웃음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아스카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혀를 낼름 내밀고 마치 값을 매기기라도 하듯이 요우코와 아스카의 온몸을 바라본다. 구석구석 핥아내듯이.
"그 입이 어떤 식으로 용서를 빌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
아스카는 메스꺼운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요우코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얼음을 떠올리게 하는 냉정함으로 EVA-R 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돌아본다.
"항, 왜 그러지? 이제 와서 쫄아 버린 거냐?"
노엘의 조롱이 끝남과 동시에 뭔가가 바닥에 크게 부딪히는 무거운 소리가 등뒤에 서 들렸다.
"뭐야?"
당연하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는 노엘들. 그 시선 끝에서는 벽에 꽂혀 있던 아라시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를 받치던 말뚝은 하나도 빠짐없이 절단되어 있었다.
"너냐?"
노엘이 요우코에게 시선을 옮기는 순간, "그렇다." 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귓가에 서. 무릎이 옆머리를 강타한 것은 그 직후였다.
"노엘!"
완벽하게 통일된 외침이 나머지 EVA-R 들로부터 울려 퍼졌다.
"한 명."
요우코는 착지하기 전에 오른손을 휘둘러 「빛의 실」을 요올의 팔을 향해서 뻗는 다. 휘감는 것은 성공했지만 잘리지는 않는다. 그들이 한 목걸이의 효력과 입고 있는 전투복의 보호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요우코의 예상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빛의 실」을 힘껏 잡아당겨 단숨에 요올과의 거리를 좁힌다. 그 턱에 발끝을 꽂아 올려 찬다.
"둘."
올려 찬 오른발과는 반대인 왼발로 요올의 어깨를 발판으로 삼아서 다시 뛰어오른다. 덤벼들려다 허를 찔린 페르히타, 베파나, 킨트가 반응하기 전에 요우코의 양다리가 조그만 회오리바람이 되어 세 사람을 후려쳤다.
"셋, 넷, 다섯."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뒤쪽으로 뛴다. 한 순간 전까지 요우코의 머리가 있던 공간을 스벤이 든 라이플의 어깨받침이 지나친다. 요우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면에 서 있는 풋키의 다리에 「빛의 실」을 휘감더니 있는 힘껏 휘두른다. 그 앞에 있던스벤이 휘말려 그대로 벽에 격돌한다. 추격하듯 요우코가 거리를 좁히며 다가간다.
그 명치에 정확히 노린 오른쪽 팔꿈치가 날카롭게 꽂히자 한 순간 경련을 일으키고 나서 두 사람은 그대로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여섯, 일곱."
마음에 새기듯이 중얼거린다. 앞으로 한 사람. 그 순간 살기가 빛을 두르고 요우코를 꿰뚫었다. 아니, 그런 것처럼 아스카에게는 보였다. 어쩌면 그것은 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우코는 얼굴만을 움직여서 그것을 극적으로 피했다. 그 뺨에 희미하게 붉은 선이 떠오른다.
요우코를 향해 공격한 것은 칼날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나이프 같은 눈빛의 소년톰테였다. 자세를 낮춰 잡고 왼손을 벌려 요우코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것이 「창」인가."
요우코가 뺨을 닦아낸다. 붉은 얼룩이 뺨에 가득 퍼진다. 순식간에 아물어야 하는 얕은 상처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회복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 너 하나에게 쓰기에는 아깝지만 말이지."
노엘이 불쑥 일어난다.
"설마, 이 정도로 우리들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목의 상태를 확인하듯이 좌우로 흔든다. 그것에 동조하듯 쓰러져 있던 EVA-R 들이 차례차례 몸을 일으킨다.
"뭐, 허를 찌르는 방법과 민첩함에 있어서는 센스가 있군. 너무나도 힘이 약하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노엘이 혀를 내밀고 웃는다.
"그러니 상을 주마. 너에게는 이것을 듬뿍 먹여 주지."
노엘의 양팔에서 예의 「아벨의 고리」가 힘차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벌린 왼손을 요우코에게 향하게 하고 팔꿈치를 굽힌 오른손을 가슴 높이에 고정한다. 마치 보이 지 않는 활을 겨누기라도 하듯이.
재빨리 주위에 시선을 보내는 요우코. 그러나 퇴로를 차단하듯이 다른 EVA-R 들이 가로막는다. 그 모두가 같은 자세로 요우코를 노리고 있었다.
"이만큼의 「창」을 맞고 어떻게 될지가 기대 되는군."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울리며 EVA-R 들의 「아벨의 고리」가 회전 속도를 높인다.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이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더해 가고, 그것은 이윽고 왼손과 오른손을 잇는 거대한 활, 아니 「창」을 형성해 간다.
"뭘 하고 있는 거냐, 킨트, 요올. 네놈들도 해라!"
그 자리에 있던 여덞 명의 EVA-R 들 중에서 그 둘만이 「창」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
"한 사람 상대하는데 「창」이 여덟 자루나 필요한가."
냉담한 말투의 요올.
"네 녀석들이 못 맞춘다면 대신 쏴 주마."
외면하는 킨트.
"흥, 실력이 없는 녀석은 입과 자존심만 살아난다고 하더니 정말이군 그래."
노엘의 조소를 어금니를 악물어 견뎌 내는 두 사람. 요우코는 입가를 살짝 일그러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릎에 힘을 모았다.
"간다, 먹어라!"
노엘의 외침이 방아쇠가 되었다. 요우코는 온몸의 힘을 담아 뛰어올랐다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떴다. 몸이 무겁다. 천장을 차서 노엘의 등뒤에 착지할 생각이었는데 그 몸은 바닥에서 30 센티 정도 떨어졌을 뿐이었다. 힘이 약해져 있다. 뺨을 스쳤을 뿐인 방금 전의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거대한 빛이 사방에서 요우코를 꿰뚫는다.
두 어깨와 양쪽 허벅지, 그리고 좌우 손바닥을 당했다. 충격으로 망가진 인형처럼데굴데굴 구르더니 낙법도 하지 못한 채 요우코는 바닥에 처박혔다. 상처는 고온으로 작열하고 출혈 자체는 적다. 그러나 그것이 치명상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통을 주기 위해 아주 잠깐 목숨을 남겼을 뿐인 잔혹한 처사였다.
"흥, 성가시게 해 주셨군."
노엘은, 아니, 그 자리에 있던 EVA-R 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뺨을 스쳤던 톰테의 일격만으로도 요우코의 에바가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금방 죽이지는 않으마. 그런 꼴이라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있으니까 말이지."
다가가려는 노엘을 밀어젖히고 아스카가 요우코에게로 달려갔다.
"정신차려. 응? 정신차리란 말이야!"
엎어져 쓰러진 요우코의 귓가에서 외친다. 그러나 요우코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응급 처치를 하고 싶어도 도구는 아무 것도 없고, 요우코의 상처는 너무나도 깊다.
시시각각 요우코의 목숨은 깎여져 나가는 것이다.
"정신차려. 제발, 부탁이니까."
요우코는 움직이지 않는다. 황급히 손을 잡는다. 손목에 맥박은 느껴지지 않는다.
튕기듯이 등에 손을 얹는다. 호흡도 멎어 있었지만 심장은 아직 움직이고 있다. 어서 구하지 않으면.
"남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공주님."
노엘의 목소리가 아스카를 향한다.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아스카를 괴롭히며 가지고 놀까, 라는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킨트와 요올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네 차례다. 우리들이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그 녀석을 치료해 줘도 괜찮겠군."
비웃는다. 이 상황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아스카는 노엘을 본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요우코를, 벽 부근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라시를, 엎어진 채 쓰러져 있는 라이를 순서대로 본다.
"정말로?"
"그건 네가 하기 나름이겠지. 네가 열심히만 한다면 모두들 살아날 수 있을 거다."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고 있지 않을 텐데도 노엘의 입은 잘도 돌아갔다.
"뭐, 뭘 하면 되는 건데?"
"뭘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아스카의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갈등이 교차한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이다. 너무나도 시간은 없었으며, 선택지 따위 처음부터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알았어."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얗기만 한 원피스의 앞단추를 하나 풀었다.
"그 대신, 절대로 모두를 살려 줘야 돼."
"그럼, 약속해 주지."
또 하나 단추를 푼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두 개. 공포로 무릎이 떨리는 것을 알수 있다.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 누군가에게 구해 달라고 외치고 싶다.
"절대로, 절대로야!"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단추를 푸는 손이 떨려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힘들게 세 개째를 풀었다. 앞으로 한 개. 공포로 하얗게 표백된 머리에 단 하나 떠오른 것은 그 녀석의 얼굴이었다. 그것이 어째서인지를 생각할 여유도 없다.
마지막 단추를 풀려 했을 때, 그것을 가로막듯이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들렸다.
"칫칫칫, 쪼―까 기다려 보셔."
"뭐냐, 죽다 만 쓰레기 녀석. 얌전히 자고 있으라구."
불쾌한 말투로 노엘이 독설을 퍼붓는다. 말을 건 소년은 깊숙이 쓴 카우보이 모자밑에서 입술을 치켜올린다. 얼굴 앞에 세운 검지를 좌우로 흔들면서.
"어―허, 거기까지다."
그 관자놀이에 한 가닥의 선혈이 흘러내린다. 움직이지 않는 요우코와 블라우스의 마지막 단추에 손을 대던 아스카를 본다.
"자고 있으라고 했다. 이쪽은 지금부터 막 즐기려던 참이라구."
그 말에 반응해서 웃음을 짓는다.
"이 쓰레기 녀석이. 네 파트너도 그렇게 말했지만 말이다!"
노엘의 말에 다른 EVA-R 들도 실소한다. 킨트와 요올마저도.
"이대로 나 살려라 도망친다면 봐 주마. 테이아이엘(아스카)의 스트립쇼에 대한 보수다."
그는 좌우 양쪽에 걸고 있던 건 벨트에서 모제르를 뽑았다. 순간 EVA-R 들에게 살기가 가득 찬다. 그러나 라이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지는 않고, 탄창을 빼고 슬라이드를 당겨 약실 내에 장전되어 있던 한 방도 뽑아낸다. 그리고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더니 발로 차서 노엘들에게 넘긴다. 잘 손질된 두 자루의 모제르가 노엘의 발밑에 모였다.
"흥, 어서 가 버려라."
아스카는 그러한 행동의 의미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희미하게 보였던 빛이 단순히 환상이었다는 것은 틀림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사라져 버릴 것 같은 희미한 목소리가 아스카에게 들렸다. 놀라서 돌아본다. 엎어진 채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린 요우코의 목소리였다.
"라이는, 내 파트너는 그런 남자가 아니다."
헛소리와 같은 말에 아스카는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걸 가지고 있어 줘."
소년은 트레이드 마크인 카우보이 모자를 던졌다.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모자는 노엘을 넘어 아스카의 손에 떨어졌다. 버릇이 있는 붉은 머리가 드러나고, 주근깨가 나 있는 라이의 얼굴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려 보였다.
"어쩔 셈이냐, 쓰레기 녀석."
"내 파트너는 세계에서 제일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지. 그러나 정말로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적은 없다."
라이의 명랑한 녹색의 눈동자가 진홍빛으로 빛난다. 좌우로 뻗은 팔 끝에서 두 손이 벌어진다.
"내 상대는 어느 녀석이냐?"
여느 때와 다름없는 말투로 라이는 선전포고를 한다.
"흥, 네 녀석들로 마무리를 지으라구. 킨트, 요올."
무뚝뚝한 얼굴을 한 두 사람이 조용히 한 걸음 내딛는다. 그 발끝 3 센티 앞의 바닥이 터졌다. 동시에 멈춰 서는 킨트와 요올.
"쓸데없는 저항이라는 걸 모르겠냐?"
킨트가 맹수처럼 으르렁거린다.
"1 퍼센트라도 가능성이 있는 이상은 그만두지 않겠어."
진홍빛 눈동자로 라이가 대꾸한다.
"1 퍼센트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요올은 그저 조용히 라이를 응시한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가능성이 제로가 되지는 않지."
뺨을 치켜올리며 라이가 웃는다.
"금방 제로가 될 거다."
"당신의 목숨과 함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상이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 아스카는 눈을 뜨고 있지도 못한 채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폭발 소리가 몇초 동안 고막을 압도한다. 그러나 그것이 느닷없이 정적으로 뒤바뀐다. 마비된 청각으로 겨우 들은 것은 딱딱한 뭔가가 바닥에 크게 부딪히는 소리뿐이었다.
"결국, 도움이 되지는 못했군."
킨트가 뱉은 침이 엎어져 쓰러진 라이의 머리를 스친다.
"그러나 아무런 예비동작도 없이 그 정도의 「뇌광」을 발사하다니. 그것도 우리들모두에 대해. 「벽」이 없었다면 지금쯤은..."
라이를 내려다보는 요올의 목소리에 여유는 없다.
"흥, 그렇다고 해도 이긴 것은 우리들이다."
힘을 해방하고 무방비 상태가 된 라이를 단숨에 짓눌렀다. 그것은 킨트가 말한 것처럼 승리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도 가슴에 남아 걸리적거리는 이 기묘한 느낌은 무엇인가.
"성대한 불꽃놀이쯤으로 생각하면 돼. 실제로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없고 말이지."
노엘이 혀를 내밀면서 비웃는다. 힘차게 회전하던 목의 「아벨의 고리」가 서서히속도를 떨어뜨리고, 이윽고 힘을 잃고 단순한 목걸이가 되어 목에 걸쳐진다. 그 은 빛의 표면에 희미하게 그늘이 져 있었다.
"노엘, 고리가 이, 이상해."
풋키의 말에 노엘은 눈썹을 찌뿌리며 목에 걸려 있는 고리를 잡는다. 표면의 일부에 살짝 금이 가 있는 것이 보였다.
"하, 이 녀석도 슬슬 바꿀 때가 된 모양이지. 이제는 우리들에게 대항할 바보도 없으니 있어도 없어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야."
노엘은 자신만만하게 화제를 끊더니 거드름을 피우듯이 아스카를 노려본다.
"항, 흥이 깨졌군. 스트립쇼도 거기까지다. 이제부터는 내 방식대로 하도록 하지."
노엘이 사라졌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스카의 두 어깨를 뒤쪽에서 잡고 있었다.
"그, 만해."
그 발목을 잡는 요우코. 움직일 리가 없는 왼손으로 요우코는 아직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
"네가 나설 차례는 끝났다구."
노엘이 가볍게 다리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요우코는 마치 인형처럼 내던져졌다. 낙법이고 뭐고 없다. 머리부터 바닥에 처박혀 두세 바퀴 구르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않게 되었다.
"역시, 여자는 울고 있는 편이 좋군."
뒤에서부터 블라우스가 찢어진다. 휴지보다도 더 간단히. 드러나는 피부와 브래지어의 끈. 공포와 절망이 아스카의 머리에서 폭발한다.
시간이 정지한다.
망가진 인형처럼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쓰러진 요우코가 보였다. 붉은 머리를 더욱붉은 피로 물들인 라이가 보였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주저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 아라시가 보였다. 모두 자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등뒤에서 맹수의 숨결과 시선을 느꼈다. 똑같은 얼굴이 자신을 보고 있다. 몹시 우스꽝스러우면서 현실감이라고 는 조금도 없는 풍경. 그러나 이것이 지금의 아스카의 현실이었다.
복받치는 비명을 억누를 수가 없다. 공포가, 순수한 공포가 뇌를 불태워 없애 버리려 하고 있었다.
외쳤다. 거절을 말로 바꿔 몇 번이고 소리질렀다. 넘어지듯이 도망쳤다. 남자들이 웃으며 뒤쫓아온다. 둘러싸여 있다. 도망칠 곳 따위는 없다. 두 팔로 가린 가슴이,드러난 등이,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아스카를 몰아 붙인다.
구해 줘!
뭔가가 머리속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팔을 잡혔다. 두 손목이 각각 다른 남자들에 의해 잡혀서 벽에 눌린다. 남은 블라우스와 브래지어가 거칠게 벗겨져 나간다.
구해 줘!!
눈물이 넘쳐 흘렀다.
믿음직하지 못한 얼굴로 미소짓는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동경했던 어른 남성의 얼굴도 아니라, 이 순간 아스카의 머리에 나타나 준 것은 그소년이었다.
신지.
갑자기 그 이름이 생각났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마치 댐을 허문 것처럼 온갖 추억이 아스카를 가득 채운다. 그랬다, 어째서 잊고 있었던 것일까. 소꿉친구로 철이 들 무렵에는 함께 있었고,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었으며, 언제나 함께였다.
어째서 이럴 때 기억이 나 버린 것일까.
신지, 미안해.
기억났는데. 겨우 기억해 냈는데.
다시 한 번 외쳤다.
싫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
신지는 제레 빌딩 앞 200 미터 부근의 도로 위에 누워 있었다. 바람과 비가 등을 두드린다. 납덩이 같은 피로가 사슬이 되어 온몸을 휘감는다.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로웠으며, 쓰러진 채 일어날 수조차도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한계는 넘어서 버렸다. 더군다나 몸이 무겁다. 특히 몸의 몇 부분이 탈력한 것처럼 마비되어 있다. 또다시 누군가가 희생된 것인지도 모른다. 뜨거워진 몸에는 비가 기분 좋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순식간에 날아간다. 복받친 위액을 토해내자 피가 섞여 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일어나기 위해 힘을 준다. 무릎이 이상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나려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누군가가 부축했다.
"미야, 양?"
"......이래서 누군가를 구할 수 있겠어?"
고개를 숙인 채 뭔가를 견디듯이 미야는 작게 중얼거린다. 신지는 거친 숨을 가다듬으면서 짧게 대답한다.
"그러기 위해서 온 거야."
비틀거리는 몸에 채찍질을 가하며 신지는 한 걸음 내딛으려 한다. 그러나 그 몸을 미야가 있는 힘껏 끌어안고 있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등에 따스함이 퍼진다. 새어 나오려는 말을 필사적으로 억누른다. "이제 그만해."
가만히 지켜 보겠다며 굳게 다짐했는데.
외침소리가 들렸다.
머리 전체를 가득 채울 만큼 압도적인 기세로 뿜어져 들어오는 「목소리」.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 미야는 혼란스러웠다. 이것은 누구의 「목소리」지?
"......아스카."
몇 초의 시간차를 두고 신지는 이해했다. 그것은 아스카의 외침소리. 공포와 절망에 드러나 버린 소오류 아스카의 외침이다.
"가야 돼."
신지는 반쯤 밀어젖히듯 미야에게서 떨어지더니, 오른 다리를 질질 끌듯이 달리기시작했다. 완만했지만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동안에도 외침은 더욱 크게, 처참함을 더해 간다.
"아스카, 아스카, 아스카."
되풀이하면서 신지는 달린다. 올려다본 시선 끝에 폭풍을 거스르며 우뚝 막아서는 거대한 빌딩의 모습이 보였다. 저곳에, 저 안에 아스카가 있다.
더 빨리, 더 빨리. 아스카가, 아스카가 부르고 있어. 조금씩 몸에 힘이 돌아온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속도가 빨라진다. 정신을 차린 미야가 뒤쫓아간다. 아직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였으며 거리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신지의 변화에.
발끝에서부터 밤의 어둠 그 자체인 검은 얼룩이 퍼져 나간다. 신지의 몸을 얼룩이 기어올라 간다. 무릎을 지나, 허리를 뒤덮고, 등을 치닫아 어깨에 도달한다. 팔로 뻗어 얼굴이 어둠의 색으로 물들자 이번에는 하얀 줄무늬가 온몸을 휘감는다. 미야의 기억속에 있는 모양. 저것은 사요코의 제어구와 똑같다.
"안 돼, 신지군!"
미야는 단숨에 거리를 좁혀 신지의 팔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아스카―!"
신지의 오른팔이 환영처럼 흐려지며, 잡으려 했던 손이 지나쳐 버린다.
"아아아아아―"
신지가 날아간다.
칠흑과 순백의 줄무늬로 뒤덮인 신지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뒤쫓아가려던 미야는 갑작기 목표를 잃고 비틀거리다 그대로 비에 젖은 아스팔트에 쓰러졌다.
가 버렸다.
역시 막을 수는 없었다. 분노도 후회도 아닌, 그저 분함과 무력함이 가슴에 가득찼다.
가 버린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
하얗고 가느다란 몸이 보였다. 풍부한 붉은 머리, 그리운 푸른 눈동자. 계속 그리던, 만나고 싶었던 소녀가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가느다란 그 손목을 붙잡고는 벽에 대고 누르고 있다. 저 검은 그림자들은 뭐지. 아스카를 둘러싸고, 팔다리를 잡고, 움직이지 못하는 아스카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이 녀석들을 죽이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신지는 그렇게 마음 먹었다. 그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다.
결정한 이상 실행해야만 한다.
한 순간이라도 빨리, 완벽하게.
사고가 폭발하고 모든 것이 살의로 뒤바뀐다. 그리운 그 감각이 되살아난다. 몸안에서 포효가 치닫는다. 이성의 사슬을 뜯어내며 또다시 짐승이 해방된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왼쪽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오른쪽 눈이 불꽃이 되어 불타오른다. 그것은 빛나는 천사의 모습이 아니라, 영맹(獰猛)한 짐승의 왕 그 자체였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왠지 무지무지 오랜만이어서 업데이트 하는 방법을 한동안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평소 때보다 적을지도. 꽤나 오랫동안 게을렀던 주제에 어쩐지 송구스럽습니다만, 그 부분은 부디 봐 주시기를.
에바 극장판을 보고 난 후로 계속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장면을 간신히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랄까 다음은 언제냐, 라는 건 묻지 않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만,오래 전부터 머리속에 있었던 장면이랍니다.
조금씩 가까워져 가는구나― 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
이런 갱신 페이스입니다만, 시간이 있을 때라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최근에는 메일을 보내 주셔도 제대로 답장도 보내 드리지 못해 죄송스럽습니다.
다만 이번에 어떻게 해서든 갱신해야지, 라고 생각했던 것은 많은 메일을 주셨기때문이었습니다.
역시 글씀이의 엉덩이를 걷어찰 수 있는 것은 감상 메일이구나― 라는 것을 조금느꼈답니다.
기럼, 다음에 또.
nary
2003/09/20
*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일본의 (C)GAINAX 의 작품입니다.
* 「Genesis Q」는 成重貴幸 씨의 인터넷 홈페이지 「Genesis Q」에 연재중인 에반게리온 팬 픽션 소설입니다.
* E-mail : 홍군(hebikun@hanmail.net) | nary(nary@big.or.jp)
* URL : 홍군(http://hebikun.egloos.com/) | nary(http://www2.big.or.jp/~nary/shumi.html)
* 이 글을 다른 곳에 옮기고자 하실 때는 사전에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 홍군 >








